※ 격·정·미는 대한민국 격동의 정치사 속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특집 포스트입니다.
전두환, 전두환. 최근 130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아 흥행가도를 달린 서울의 봄에서는 '전두광'이라는 캐릭터로 표현된 전두환. 전두환만큼 대한민국의 문제적 인물도 없을 것이다. 똑같이 독재자이긴 하나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빛과 엄혹한 군사 독재라는 어둠이 격렬하게 어른거리는 박정희라는 존재와는 다르게 전두환의 평가는 비교적 일관되게 '독재자'라는 이미지만 남아있다. 그렇다. 수년간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거머쥐고 휘두르는 사람으로서 세간에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두환이라는 사람은 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무소불위의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을 언제부터 꿈꾸고 있었을까.
- 전두환,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의 눈에 들다
1955년 3월에 전두환은 육사를 11기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육사 11기는 당시 해방과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럽던 육군 장교 교육 체계가 정리되고 처음으로 4년제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개교한 육군사관학교의 첫 정규 기수이다. 임관 성적은 156명 중 126등으로 81% 수준이었는데 이는 공부를 매우 못한 것에 속한다. 그러나 전두환은 리더십이 뛰어나고 붙임성이 매우 좋았으며,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생도 시절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이었던 이규동 대령의 집에 대뜸 들어가 생도들 수십 명의 밥을 달라고 넉살 좋게 요구를 한 일이다. 이 일로 만나게 된 이규동은 박정희와 같은 육군사관학교 2기이다. 이규동은 이 리더십 있어 보이는 젊은 청년 생도를 눈여겨봤고, 한참 나이 어린 자신의 딸을 맡기게 된다. 여기서 만난 이규동의 딸의 이름이 바로 이순자이다.
여기서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 이규동 참모장은 몇 년 뒤 준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경리감으로 지내며 자신의 사위 전두환을 영등포 6관구 사령관 소장 박정희에게 소개해준다. 그 당시 박정희는 자신의 부관으로 지낼 것을 제안하지만 전두환은 '자신은 부관 체질이 아니다'며 정중히 거절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노태우 등과 함께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가는 등 초급 장교의 길을 걷다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 ROTC 교관이 된다. 이때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한다.
전두환은 병력을 지휘하는 일선 부대 장교는 아니었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에는 참가하지 못한다. 다만 정변 당일날 아침에 육본으로 가서 동향을 파악하는 등 기민한 면모를 보였다. 당시 박정희의 부관은 전두환의 육사 11기 동기 손영길(하나회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전두환은 어떻게든 정변에 끼어 박정희 세력을 돕고자 했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젊고 정의로운 육사 생도들이 이 정변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다면 국민들이 '혁명'의 정당성, 그리고 정통성을 받아들일 것"이라며 육사로 향했다. 당시 육사 장교 강영훈 중장은 전두환의 육사 생도 동원을 거부했으나 전두환은 이를 혁명군부 본부에 즉시 보고하였고 강영훈은 즉시 구금되었다. 결국 운명의 장난인지 이틀 뒤 5월 18일 육사 생도들은 전두환의 지시대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는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큰 기여를 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그의 계급은 대위,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 박정희 시대의 전두환
그 이후 전두환은 군내 최중요보직을 줄줄이 맡아가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1962년에는 박정희에게 직접 '전역을 하고 의원직에 출마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군에도 각하께 충성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대답과 함께 거절을 한다. 그리고 군 내에서 박정희의 친위대이자 자신의 사조직이자, 훗날 한국사에 크나큰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가꾸어나가기 시작한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 3 공화국 시절에도,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본격적인 독재를 하던 4 공화국 시절에도 박정희가 홀로 모든 권력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늘 2인자는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남산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권력의 역학, 그리고 풍향계에 날카로운 감각을 갖고 있었기에, 2인자들의 힘이 너무 커졌다고 판단되거나, 정국이 불안정해 자신의 권력에 흠이 생기는 경우에 2인자를 가차 없이 제거하고 3인자를 끌어올리거나 혹은 권력의 역학관계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아랫사람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도를 만들어놓곤 했다.
전두환도 그러한 박정희의 권력 분배 구상에 들어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아직은 전두환의 사조직이라는 성격보다, 박정희의 친위대라는 성격이 강했던 하나회의 일원이자 수장이며, 사실상 국내에서 박정희의 권력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칼끝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보안사령부의 사령관이 된 전두환. 그도 박정희 체제에서 권력 피라미드에서 최상부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 박정희 서거. 전두환, 한직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권력은 진공상태를 싫어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절대자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온 나라가 멈추고, 즉각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어 계엄령이 떨어졌다. 대통령 시해 사건 조사를 위한 수사팀이 꾸려졌고 보통은 민간 사정기관인 중앙정보부나 행안부를 중심으로 하여 수사가 이뤄졌어야 하겠지만 시해범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고, 범행 장소에 경호실장 차지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등이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령부에서 수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다. 이로서 10월 26일 이후 온 나라의 정보란 정보는 모두 보안사령관을 통하게 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정승화는 전두환과 뜻이 달랐고, 박정희와도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군정권(인사권)을 참모총장으로서 여전히 쥐고 있던 정승화는 박정희 친위대를 자처하며 군내 승진 등을 독식하며 끼리끼리 챙겨주던 하나회를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킬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해안경비사령부는 현 제7기동군단의 전신으로, 현재는 육군 최중요 장군 보직 중 하나이다) 또한 강직하고 파벌이 없던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박정희 유고 체제에서의 숙군 작업을 시도하려고 했다. 전두환의 무운이 자칫하면 여기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12.12 거사에 성공한 전두환
전두환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야만다.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내 최고 상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을 박정희 사망 당시 같은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조사가 필요하다는 사유로 그를 보안사로 압송하는 그야말로 하극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 자세한 내용은 비교적 상세하게 영화 '서울의 봄'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12.12 사태로 전두환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속된 말로 제쳐버렸지만, 전두환은 군부의 수장만 무력화시켰을 뿐, 대한민국의 권좌에 앉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장애물이 남아있었다. 정부 내각에는 정승화 참모총장 수사에 재가를 받아오라며 제동을 건 최규하 대통령과 최의 옆에서 강경하게 전두환에게 저항하던 신현확 국무총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박정희의 선택으로 인해 유신 정부의 최고위직을 맡고 있던 요인들이었으며, 정승화, 최규화, 신현확 이들은 박정희 유고 사태에도 위태롭지만 나름대로의 안정을 추구하며 정부와 군부의 통치 능력을 떠받드는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아슬아슬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서울의 봄 영화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강짜에 매우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대통령으로 나오지만, 그는 4.19 혁명으로 세상이 바뀌고 자유당 정부의 내무부장관 최인규 등의 내각 주요 인사들 몇이나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사실을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게다가 박정희의 죽음으로 세상의 공기는 달라졌다.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은 이전과는 다르게 한껏 부풀어 올랐고, 이 상황에서 박정희의 뒤를 잇는 또 다른 군인 대통령의 등장에 국민들이 반색을 보일 리는 만무했다.
- 보안사의 집권 플랜, 격동의 1980년
그러나 전두환에게는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무기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사조직 하나회였다. 그는 12.12 쿠데타 이후 정승화를 끌어내리고, 군정권(군의 행정과 관련된 권한)을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되자 하나회 인사들을 일제히 전면에 배치하여 비 하나회 출신을 배제한 군 인사 개편을 시행한다. 전두환 본인은 80년 3월 1일을 기해 어이가 없는 속도로 중장 진급을 셀프 수여한다. 이렇게 군권을 장악한 그는 원래 민간인만 앉을 수 있는 자리였던 중앙정보부장 서리(대리직)를 겸직하게 된다.
여기서 두번째 무기가 등장한다. 그는 보안사령부를 군내, 군외에 모르는 정보가 없을 정도로 촉수를 사방팔방에 거느린 조직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중앙정보부마저도 장악하며,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정보란 정보는 모조리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 수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시해범이 되는 바람에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중앙정보부는 보안사령부의 수족 역할을 하는 하부 조직쯤이 되었다. 그리고 보안사령부는 이때부터 하나회,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정권 장악 시나리오를 짜게 된다. 이 당시에 계획되고 시행된 정권 장악의 세부 시나리오 및 계획들은 다음과 같다.
-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 신군부는 군부를 장악한 뒤 정치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작전이 바로 5.17 비상계엄확대, 5.17 내란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무르익은 민주화의 열기를 차단하기 위해 벌인 조치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야권, 학생가, 재야 운동권 등 야권 성향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을 가택 연금, 불법적인 구속 등으로 발을 묶어놓았다. 당시 배경을 잘 살펴보자면 5월 15일 서울에서는 10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민주화 시위가 열리는 등 신군부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에 전두환은 보안사 정보처를 통해 시국 수습 방안을 내놓았고, 이로 인해 탄생한 조치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국가 해산, 이후 새로운 국정 기구 설립이었다. 신군부는 "박대통령 유고로 인해 국정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북괴의 침범이 우려스러우므로, 빠른 시국 안정화를 위해 군이 나서야 한다"는 논리로 이러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밀어붙였다. 이는 1979년에 발생한 12.12 군사반란과 이어서 보면 6개월이나 걸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막상 군을 장악했지만 국정에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그러나 치밀하게 짜인 계획 하에 5월 17일 발령한 계엄령 이후, 신군부는 전국이 계엄하에 있었기 때문에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함에 있어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한다'는 명목으로 임시기구를 설치한다. 이 기구가 바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줄여서 국보위이다. 국보위 의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으나 이는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국무총리 이하 모든 장관급 국무회의 배석자와 각군 참모총장 등의 인사권은 모두 국보위의 상임위에서 결정하였으며, 이 상임위원회의 의장은 전두환이었고 위원회 위원들 대다수가 하나회, 혹은 신군부의 입맛대로 뽑힌 자들이었다.
- K-공작 계획 :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집권을 위해 언론을 활용할 계획을 구상했다.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 1일경부터 보안사에 정보처를 신설하고 정보처 내에 언론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이른바 ‘언론반’을 가동했다. 1980년 3월에는 언론에 대한 회유와 공작을 핵심으로 하는 'K-공작계획'을 만들었다. 그 실행을 위해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인을 받고 별도의 언론조종반(대책반)을 구성했다. 언론반(언론조종반)의 주요 업무는 검열 조종 업무와 공작 업무로 나뉜다. 검열 조종 업무란 시청 검열단에서 매일 실시하는 언론·출판 보도검열 업무를 조종․감독하는 것이고, 공작 업무는 설정된 임무수행을 위해 각 언론기관의 주요 인사에 대한 접촉공작을 시행하는 것이다. K-공작계획의 K는 King을 의미하며, 이는 신군부의 수장(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이라는 의견이 있다.
- 충정 훈련 : 충정부대란 수도권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경우 신속한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부대를 이른다. 전두환 체제 하의 1980년 충정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부대,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일부 공수여단 등이 해당되었으며, 특히 이 중 공수여단은 5월 18일 광주에 광주 보병학교, 육군기갑학교 등의 병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입되는 등 충정부대는 철저하고 무자비한 소요 운동 진압만을 위한 부대라는 것을 1980년 일련의 사태를 통해 증명이 되었다.
- 녹화 사업의 연장 : 녹화 사업이란 "빨갛게 물든 것을 파랗게 만든다"는 것으로, 당시 "빨갱이"라고 몰리던 모든 학원가의 학생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보안사의 계획이었다. 이 또한 박정희 시대에도 시행된 사업이지만,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달아오르자 주요 학생 운동가들 중 결격 사유가 특별하지 않은(실제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만한 위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형을 살 것인지, 아니면 즉시 입대를 할 것인지를 강제로 선택하게 만드는 사업이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전두환의 대통령 등극
1987년 10월 27일, 박정희가 사망한지 1년 하고도 하루 뒤에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SF5eAkLOTKo
진실탐색자의 결론
전두환은 군문에 발을 들일 때부터나,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고속 승진가도를 내달릴 때에, 그리고 박정희 유고라는 초유의 상황에서도 대통령이라는 만인지상의 자리를 목표로 삼고 있었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인생 전반을 돌아봤을 때, 5.16 군사정변 당시 무리하게 육사 생도들을 모아 박정희의 눈에 드는 기지를 보여주거나, 장군으로서 퇴락의 길을 걷게 될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의 좌천될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과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12.12사태라는 모험을 하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등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만큼은 그 누구보다 발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2.12사태라는 헌정사 두 번째 군사정변을 일으킨 이후 전두환에게는 대통령이라는 옥좌가 눈앞에 어른거렸음이 분명하다고 보인다. 보안사라는 막강한 기관을 바탕으로 한, 무자비하고도 철두철미한 집권 계획을 차례차례로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 망설임이 있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으로, 그리고 독재자로, 그리고 유혈사태의 책임자로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는 전두환이지만, 그의 평소의 야심,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타고난 기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격·정·미는 한국 정치사의 미스터리를 다루는 만큼 정치적으로 최대한 많은 분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의혹과 미스터리한 부분 등 흥미로운 부분을 다루기 위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사건이나 인물을 서술할 것이며 제 개인적인 생각은 포스트 마지막에 짧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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