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사고/대한민국 격·정·미

[격·정·미] ep 1. 한국 정치사 속 테러 사건

진실탐색자 2024. 1. 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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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정·미는 대한민국 격동의 정치사 속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특집 포스트입니다. 

 

브루투스에게 칼을 맞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죽음(1806), 빈첸초 카무치니 작품

혹자는 이야기한다. 정치인과 테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하고 또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업인 사람이고, 늘 그 과정을 대중과 함께 해야만 하기에 언제나 누군가가 휘두를지 모르는 폭력의 위험을 감수하며 정치를 펼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것은 만인지상의 황제도, 막 정치를 시작한 초짜 정치인에게도 늘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는 어떤 정치 테러들이 있었는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 이재명 신년 행사 피습 사건

피습 직후 응급처치를 받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2024년 새해 벽두부터 정치인에 대한 테러가 벌어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는 1월 2일 부산 강서구의 가덕도 신공항 건설 예정 부지를 시찰하며 새해 첫 정치 일성을 치르고 있었다. 이재명 대표는 이후 다른 곳으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기자단과 질의응답을 하며 이동하던 도중 더불어민주당의 당색인 파란 점퍼를 입고 머리에는 이재명을 응원하는 문구를 넣은 종이 모자를 쓴 한 남성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대표님, 사인해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이재명의 얼굴과 목을 향해 칼을 찔렀다. 현장에 있던 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재명에게 펜과 종이를 건네 손을 쓰지 못하게 만든 다음 곧장 오른손에 들고 있는 흉기로 이재명 대표의 목을 찔러 상처를 입혔다. 범인은 그 즉시 민주당 인사와 행사를 통제하던 경찰 인력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재명 대표는 부산대병원에서 응급처치된 후 본인 의사에 따라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어 약 1cm~1.6cm가량 손상된 경정맥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경동맥 바로 옆의 경정맥이 손상된 것으로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상황이었으나, 각 병원의 적절한 치료로 목숨은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경찰은 이재명을 공격한 가해자에게 명백하게 살인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구속하였으며,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로 이재명을 칼로 찔렀는지, 공모를 한 공범 혹은 배후에서 일을 지시한 자 또는 세력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내기 바빴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가해자는 66세의 남성으로 충남 아산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으며, 악 5년 전까지는 여당인 국민의 힘의 전신 새누리당과 국민의힘 당원이었다고도 하고, 1년여 전에는 민주당에 당원 가입을 했다는 말이 있으나 각 정당에서는 사안의 경중을 고려해 입장 발표에 신중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음모론까지 생겨났는데, 가해자는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으로 찌른 척만 한 것인 이재명 측과 공조한 자작극이라는 설, 또는 보수 정치 유튜버 측에서 사주하고 후원한 암살 미수 사건이다라는 설까지 다양한 음모론이 생겨나고 지고 있는 중이다. 1월 6일 현재 그의 이재명 피습에 대한 의도가 무엇인지, 배후에 어떤 인사가 있는지, 공모자는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은 8쪽의 변명서라는 자술서를 이미 작성한 뒤 범행을 작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해당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 당국과 행안위에서 현행법상의 이유를 들어 자술서를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여 이 범인의 범행 동기가 무엇인지 신속하게 밝혀지지가 않고 있기 때문에 각 정당과 지지층,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이 사건의 귀추를 빨리 알아낼 수 없어 강력하게 범인의 정체, 공모자의 여부, 그리고 범행 동기에 대한 정보 공개의 촉구에 나서고 있다.

 

 

  • 송영길 망치 피습 사건

송영길 피습 직전의 사진. 뒤를 돌아보고있는 송영길 대표(가운데) 오른쪽에 장도리를 내려 찍으려는 자가 표삿갓이다.

2022년 3월 7일은 이틀 뒤에 있을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다. 이날 오전에도 선거 캠페인에 열심이던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 송영길은 서울 신촌에서 이재명 대선후보 유세 지원에 나섰다. 그런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송영길 당대표의 뒤에서 장도리로 그를 가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장도리로 3번 송영길 대표의 뒤통수를 때린 직후 가해자는 큰 소리로 "한미 군사 훈련을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라고 외쳤다. 그는 즉각 경찰에게 제압되어 선거운동 방해 등의 공직선거법 위반과 특수상해의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송영길 당대표는 피습 직후 인근의 연세대학교 신촌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며, 생명에 지장이 있을 만큼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가해자의 신상은 곧장 밝혀졌다. 그는 표삿갓 TV라는 채널명의 유튜브를 운영하고 표삿갓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고 있는 59세의 정치 운동가 표화종이었다. 평소에 그는 민주당을 지지하나 초강경 민족주의 성향과 유교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선후보 이재명과 당대표 송영길이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잘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여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의 유튜브 채널 영상으로 한미연합훈련의 반대와 정전협정 이행, 그리고 남북통일에 대한 컨텐츠가 많았고 이에 반하는 송영길에 대한 비판 영상을 찍어 올린 적이 있었다. 표화종은 2022년 4월 24일 향년 69세의 나이로 서울 구로구 서울남부구치소에서 유서를 남기고 옥중에서 자살했다.

 

 

  • 김성태 폭행 사건(2017)

2018년 제1야당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였던 김성태 의원은 5월 들어 2017년에 치러진 19대 대선 당시 인터넷 여론 조작을 주도한 별칭 '드루킹'과 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대한 특검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단식이 한창이던 어린이날 5월 5일, 그는 오후 2시 30분경 김 모 씨에게 오른쪽 턱 부위를 가격 당해 찰나 의식을 잃고 곧장 병원으로 실려갔다. 가해자는 31세 남성으로, 공격 직후 주위의 사람들에게 제압당해 경찰에 입건되었다. 이후 신속하게 구속영장이 신청되었으나 가해자 아버지의 간곡한 사과로 김성태 의원은 가해자의 선처를 부탁했고 가해자는 2018년 6월 21일 재판부에 의해 사회봉사 80시간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가해자는 무직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고, 정치적 견해를 판가름할 수 있는 인터넷에 쓴 글, 댓글 상에 드러난 정치 성향도 오락가락하여 그 의도가 단순한 불만 표출인지 아니면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피습이었는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 피습사건(2015)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운데)가 피습 직후 현장을 떠나고 있다.

2015년 3월 5일 주한미국대사 마크 리퍼트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조찬행사에서 피습을 당했다. 리퍼트는 날길이 10cm가 넘는 과도에 얼굴이 찔려 80 바늘을 넘게 꿰매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리퍼트 대사를 공격한 자는 1980년대부터 반미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남북 화합을 위해 시민사회에서 활동한 통일 운동가 김기종이었다. 그는 통합진보당이 속해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의 일원으로, 키 리졸브 등의 모든 종류의 한미 연합훈련을 '전쟁도발연습'으로 규정하고 독도지킴이 시위 등의 합법 시위부터 전작권 회수 운동, 한미연합훈련 반대 시위 등 불법시위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다. 또한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허가를 받고 6차례 방북했으며, 2007년에는 왕재산 사건으로 밝혀진 지역 간첩 총책이었던 임 모 씨와 함께 방북한 것으로 알려진 친북, 혹은 종북 인사이다. 2007년에는 본인이 속해있던 단체인 '우리마당' 피흡사건의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다 분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김정일이 사망하자 서울 도심에 김정일 분향소 설치를 시도하여 우익 단체와 충돌했다. 무엇보다 그는 리퍼트 대사 공격 5년 전인 2010년 7월 7일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주한 일본 대사 초청 강연회에서 콘크리트 벽돌 2개를 투척하는 등 이미 외교관을 공격한 전례가 있으며, 이때 외국사절폭행죄로 유죄 선고를 받아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리퍼트 대사를 공격한 혐의로는 재판부가 김기종에게 살인미수를 인정하여 징역 12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

 

 

  • 박근혜 커터칼 피습 사건(2006)

피습 직후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지방선거가 한창이던 2006년 5월 20일 한나라당의 대표 박근혜는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유세를 위해 서울 현대백화점 신촌점 앞 광장에서 대중을 상대하고 있었다. 도중 괴한에게 커터칼로 얼굴을 기습당하고 말았다. 가해자 지충호는 청중 사이에 잠입해 있다가 박근혜에게 다가가 커터칼을 꺼내 박근혜의 우측 뺨에 대고 그대로 그어서 길이 11cm, 깊이 1cm 이상의 상처를 입혔다. 이 사고로 박근혜는 인근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봉합수술을 받았으며, 지충호는 아수라장이 된 유세장에서 "대한민국만세!"라고 외친 뒤 칼을 버리고 달아나려 했으나 당직자들에게 붙잡혔다. 이후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가해자 지충호는 불우한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징역 4년형 등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등 지난한 삶을 살다 출소 후 정치인들에게 줄을 대려 했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고, 삶에 대한 비관을 해소하는 분풀이성 목적으로 박근혜 대표에게 기습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충호는 해당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선고 후 다른 추가 사건으로 추가 복역했다.

 

 

  •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1974)

1974년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행사는 KBS, MBC, TBC 등 TV 채널과 라디오 채널에서도 음성 생중계를 진행하고 있던 큰 행사였다. 이날 경축사의 내용은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이었다.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이 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채 10분도 연설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멈추고 말았다. 총소리가 울린 것이다. 범인은 일본 이름으로는 난조 세이코, 한국 이름으로는 문세광인 재일 한국인이었다. 행사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경호원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게 대응을 했다. 문세광은 총 4발을 쏘았고 총성은 7발이 울렸다.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저격한 총알은 빗나갔으나 네 번째 흉탄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박정희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영부인을 죽게 만든 이 사건은 1974년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문세광은 일본 오사카시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으로, 북한계 재일 조선인 단체인 조총련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는 북한 선박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의 공작지도원과 면담과 함께 극찬에 가까운 격려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북한의 지도원은 "남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남조선의 사회 혼란을 조성해야 하는데, 박정희를 암살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사업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시한 혁명과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켜야 한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문세광은 일본 경찰의 권총을 훔친 뒤 한국으로 건너가 행사에 잠입하는 데 성공, 암살을 거행한다.

그는 암살로 즉각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22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매우 많은 의혹과 음모론이 낭자하는 사건으로 유명한데, 바로 문세광이 고급 외제 세단 차량을 대절하여 장충동으로 향하였던 것도 의문이고, 어떻게 권총을 소지한 채 행사장으로 들어갔으며, 또 총이 몇 발 발사되었는가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이 발사의 수에 관련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발달한 음향 분석 기술에 힘입어 아마도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죽인 것이 아닌, 경호원의 총알이 육영수 여사를 죽이게 한 원인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문세광은 일본에서 총을 두 자루 훔쳤는데, 본인은 총 하나는 호수에 버렸다고 진술했지만 이 총은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평소 육여사와 불화가 있어 이 기회로 죽게 했다는 자작극 음모론까지 있었다. 이 자작극 음모론은 북한의 선전용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적 돌파구 마련을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내러티브로 적극 이용되었다.

 

 

  • 김대중 납치 및 암살 미수 사건(1973)

김대중은 1971년 5월에 겪은 정치 테러로 의심되는 대형 교통사고의 후유증을 치료할 겸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하여 체류하다 10월 1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그대로 일본 망명을 결심했다. 김대중은 이때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한민통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으로 취임해 미국과 일본의 한국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을 대상으로 한 반정부 투쟁을 개시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에게 혼쭐을 내거나, 혹은 국외에서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아니면 목숨을 끊어버리든 간에 국내로 끌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본 한복판에서 그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본 정치인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향하던 김대중은 괴한 5명에 의해 납치당했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오사카 내지는 고베로 추정되는 장소의 안가로 데려가 옷을 갈아입힌 뒤 한국으로 향하는 중정의 공작선 용금호에 김대중을 태운다. 그런데 뜻밖에 일이 벌어지는데, 바로 미국의 중앙정보부 CIA가 김대중의 납치 소식을 즉시 파악하고 김대중의 소재를 24시간 안에 파악하고자 한국 내에서 공작활동을 벌인다. 당시 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는 한국 중앙정보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라고 경고했다. 그 즉시 어떤 소속인지 불분명한 비행기 한 대가 용금호 근처로 접근하여 위협적인 경고 비행을 한다. 김대중은 배에서 53시간 동안 고초를 물도, 음식도 먹지 못하고 복면을 쓰고 결박당한 채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이윽고 용금호로 어떤 전화가 걸려왔고 그 즉시 선원들은 김대중의 복면을 벗기고, 손을 풀어준 뒤 갈증을 호소하는 김대중에게 물을 주기까지 하였다. 김대중은 부산항에서 동교동 자택 근처로 옮겨졌으며 풀려났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에 풀려난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중앙정보부가 납치한 김대중을 채 해코지하기 전에 풀어주며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사건의 최윗선 지시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를 위시한 박정희 정부의 첩보 공작 계통의 의사결정권자 및 이해관계자들은 대부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 경호를 위해 김대중을 먼저 처리한 후 보고하기 위해 일을 저질렀다고 증언하지만, 이미 중앙정보부에 의해 테러를 당한 바 있던 김영삼을 비롯한 당시 야권인사들은 실질적으로 이 일을 박정희의 명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여전히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해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면 어느 선까지 피해를 끼칠 생각이었는지 여부는 하나도 확인되지 않았다.

 

 

  •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1969)

김영삼 초산 테러를 실은 신문 기사

1969년 6월 20일 국회의 화두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의 발판이 될 3선 개헌을 통과시키느냐, 마느냐였다. 당시 41세의 국회의원이자 신민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 격) 김영삼 의원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요, 잡으라는 공산당은 안 잡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정보부가 개헌 음모에 가장 깊이 관련하고 있다.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충고한다. 민족의 영원한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짓 하지 말라. 총리는 정보부장 파면을 건의할 생각 없는가?"

그리고 그날 저녁 김영삼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자신의 승용차로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자택으로 귀가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골목에서 작업복을 입은 청년 몇 명이 길을 가로막고 김영삼의 차량 문을 열려고 했다. 위협을 느낀 김영삼은 운전기사에게 "나를 해치려는 것이 분명하니 빨리 차를 달려라"며 차를 출발시키게 했다. 그러자 청년 중 한 명이 무언가 담긴 유리병을 던졌고, 병은 차량 후방 유리창에 부딪혀 박살 났다. 차창은 깨지지 않았고 김영삼은 다치지 않고 집까지 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보니 악취와 함께 차량 뒷부분의 페인트가 다 녹아내려 있었다. 심지어는 범행 현장의 아스팔트도 녹아내렸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초산(질산의 일본식 한자어)은 폭발물의 원료로 사용되는 등 엄격하게 관리되고 일반인이 구하기 쉽지 않은 물질이라 김영삼 측은 테러의 주체가 누구인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김영삼은 분기탱천해 다음날 국회에서 중앙정보부를 자신에 대한 테러 주체로 지목했고,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을 민족반역자로 칭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영삼과 야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은 통과되었고, 이 사건 이후 야당에 대한 테러는 더욱 심해졌다.

 

 

  •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1956)

1956년 대통령 선거와 연이어 치른 부통령 선거에서는 각각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과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이 선출되었다.(당시에는 부통령 제도가 있었고, 대통령과 부통령 각각 따로 선거를 했으며, 정당이 같지 않아도 행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출이 될 수 있었다.) 9월 28일 장면은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 최고 위원에 조병옥을 선출하고 최고 위원으로 장면 등이 선출되었다. 장면은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 위원으로서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마친 후, 단상에서 내려와 건물 동문을 통해 나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장면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장내가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장면이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가 "나는 안전하니 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오."라고 말해 대중을 다독인 뒤 내려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잡힌 범인은 김상붕이었는데, 일단 현장에서 민주당원들에게 붙들려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후 이뤄진 조사 이후에 경찰은 민주당 내 계파 갈등에서 비롯된 정치적 저격 미수 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당시 국민들 중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후 1960년 4.19 혁명 이후에야 사건의 전말이 모두 밝혀졌는데, 이 저격 미수 사건은 무려 십여 명의 명령 하달 과정을 거쳐 실행된 암살 시도였으며, 그 명령 사슬의 최상단에는 이승만의 심복이자 1956년 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자유당 후보이자 자유당의 실세였던 이기붕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사망할 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하게 되어있었는데, 이승만은 81세의 나이로 당시에는 매우 고령에 속하는 연령이었으며 이에 불안감을 가진 이기붕을 위시한 자유당 측은 장면을 매우 껄끄럽게 생각했다. 이리하여 이기붕은 측근들에게 장면을 제거하는 아이디어를 넌지시 제안했고, 이들이 자신의 하급자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기를 반복하여 김상붕이 장면을 쏘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총 7명이 이 사건의 범인 및 주동자로 몰려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장면이 직접 사형은 가혹하니 감형시켜 달라고 선처를 호소하였고, 이들은 추후에 무기징역, 그리고 추가적인 감형 등으로 15년여를 옥살이를 하다 모두 박정희 정권 때 석방 및 형집행정지되었다.

 

 

  •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1952)

미국 기사에 나온 이승만 암살 시도 직전의 사진

6.25 전쟁이 전방의 고지전 양상으로 흘러가며 소강상태에 접어든 1952년의 6월 25일,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충무로 광장에서는 6.25 전쟁의 지난 2년을 돌아보며 대적관을 상기시키기 위한 '6.25 멸공 통일의 날' 기념일 행사가 정부 주재 하에 치러졌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훈시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 근처에 있던 이가 갑자기 등장해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4번이나 권총을 쏘았다. 그는 연설대 뒤의 VIP 의석에 앉아있던 유시태로, 일제강점기 좌익 항일 무장 투쟁 단체 의열단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 4발의 저격은 모두 불발탄이 되어 그 어느 누구의 피도 보지 못했다. 그 즉시 유시태는 미군과 대통령 경호대의 혼합 경호 병력에 제압되어 육군 특무대로 끌려갔다.

이후 부산 지방 검찰은 유시태와 유시태에게 권총과 행사에 입고 갈 양복을 빌려준 민국당 국회의원 김시현을 비롯한  12인의 인사를 구속했다. 2달 여가 지나 첫 공판이 열리고 판사는 유시태에게 범행 동기가 무엇인지 물었고 유시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 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며,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 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 또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를 죽이기는커녕 되레 주일대사를 시키는 그런 대통령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러나 변호사의 변호와 피고인의 증언이 엇갈리고, 유시태는 일부러 약실의 총알을 전부 다 불발탄으로 만들기 위해 총알을 물수건에 적셔놓았다는 주장을 하는 등 사건의 주동자와 배후, 그리고 진상은 갈수록 밝히기 어려워져만 갔다. 결국 대구 고등 법원에서 암살을 시도한 유시태와 이를 직접 지시한 김시현에게는 사형을 언도했고 나머지 인물들에게도 제각기의 형을 집행했다. 유시태와 김시현은 옥고를 치르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석방되었다.

 

 

  • 백범 김구 암살 사건(1949)

MBC 드라마 제1공화국(1981)의 김구 암살 장면

1949년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 사용되었던 경교장에 머물고 있었다. 6월 26일, 어느 날과 다름없이 김구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 시간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때 김구를 문안하고 싶다고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김구가 소속된 정당인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자 육군 포병 장교였던 소위 안두희였다. 이때 경교장의 보안 담당자들은 그가 김구를 죽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저 군인이니 당연하게 여기고 출입을 허가했다. 그리고 비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안두희는 총으로 김구를 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안두희는 "남북 협상을 통해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범구를 단죄하기 위해 김구를 죽였다"라고 재판장에서 항변했으며, 즉각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후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사건 당시 조사, 판결 등의 사후처리에 깊숙이 발을 들인 국군 군부는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43년이 흐른 1992년이 되어서야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으며, 국회는 1993년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 개인이 우발적으로 저지를 범죄가 아니라,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모의된 정권 차원의 암살이었음이 밝혀졌다. 안두희가 암살하도록 추동한 배후에는 당시 만주군, 일본군 출신이 많았던 군부가 1차적으로 있었으며, 극우 단체였던 서북청년단 도한 개입해 있었다.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서북청년단 출신이었던 장은산이 안두희에게 암살을 명령하였다. 이후에는 안두희가 국군 장교임과 동시에 미군방첩대의 요원이었으며, 김구와 관련이 아주 깊은 테러단체 백의사의 단원이었다는 문서까지 발굴되었다. 따라서 김구의 죽음에 누가, 어떤 세력이 큰 책임이 있는지는 또 다른 미궁에 빠진 질문이 되었다.

 

 

  • 몽양 여운형 암살 사건(1947)

몽양 여운형(1886~1947)은 3.1 운동의 기획자이자, 임시정부와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좌우합작운을 펼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하나이다. 1947년 7월 19일, 그는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이라는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범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 및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재판부에서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았고, 수감된 후에는 6.25 전쟁을 거치며 행방불명되었다.

여운형 암살 사건의 진상은 여운형이 사망한 지 무려 27년이 지난 1974년이 되어서야 밝혀졌다. 한지근 등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들은 다른 독립운동가였던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의 집을 거점 삼아 교류하며 우익적인 사상 공부를 했으며, 이들은 김구, 신익희 등과 관련이 있던 우익 민족주의 성향의 테러단체인 백의사의 핵심 인물 염동진과 접촉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운형을 두고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들은 염동진과 한민당의 창당 인사인 양근환에게 무기를 제공받아 여운형 암살에 착수했다.

여운형은 사실 그날의 암살 시도 이전에도 십여 차례가 넘는 테러를 당해왔다. 암살 시도가 극에 달했던 2년 사이의 어느 날 이러한 의연한 말을 남겼고 이 말 그대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단말마는 "조국... 조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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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탐색자의 생각 

정치와 테러, 테러의 본질인 폭력과 정치는 누군가에게는 불가분의 관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더 나은 정치를 꿈꾼다면 이러한 테러는 일어나서는 지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만이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이다.'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을 위해,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지 정치를 위해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역순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나라 정치 현대사의 굵직한 정치 테러들을 알아봤다. 생각보다 정치 테러가 적지 않았고,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순탄치 않았던 시대적 흐름만큼이나 정치인들의 삶에도 질곡이 많았겠구나 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읽는 사람들 가슴에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혼탁했던 해방 직후 암살 시도가 많았던 것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느낀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사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갈 길이 멀고,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두근거림을 유지하고 포스팅을 지켜봐 주시길.

 

격·정·미는 한국 정치사의 미스터리를 다루는 만큼 정치적으로 최대한 많은 분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의혹과 미스터리한 부분 등 흥미로운 부분을 다루기 위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사건이나 인물을 서술할 것이며 제 개인적인 생각은 포스트 마지막에 짧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격·정·미] ep 2. 전두환은 처음부터 대통령이 목표였을까

 

[격·정·미] ep 2. 전두환은 처음부터 대통령이 목표였을까

※ 격·정·미는 2024년 4월 10일 제22대 총선을 전후로 하여 대한민국 격동의 정치사 속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특집 포스트입니다. 전두환, 전두환. 최근 130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아 흥행가도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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